양아치와 건달, 그리고 CRM

장사꾼이라고 말할 때 쓰는 ‘꾼’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또 장사(아)치를 말 할 때 쓰는 ‘아치’라는 말은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꾼’은 전문적(Professional)인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고 ‘아치’는 단순히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붙일 수 있는 싸구려 호칭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유행하는 ‘조폭’ 영화에서 조폭은 대개 자신들을 ‘건달’로 부르며 ‘양아치’로 불리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건달은 나름대로 조직의 원칙을 중시하며 작은 일에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푼돈을 뜯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를 이들은 양아치라고 부르며 멸시한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를 극화한 드라마에서는 조선시대 한 상인의 일대기를 통해 소위 장사꾼의 도덕률과 비즈니스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장사’ 즉 비즈니스란 ‘이문을 남기기 위해 물건을 사거나 만들어서 파는 일’이다.
즉 요즘 개념으로 치면 단순히 ‘물건을 파는 일’이라는 뜻의 판매(販賣, sales)보다는 좀 더 넓은 뜻을 가진 경영과 마케팅의 개념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다. 또한 성공적인 장사의 비결은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그리고 돈을 대는 전주(錢主)나 중간 거간들까지도 모두 만족하는 win-win 전략에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윈윈 전략은 생산-유통-판매-소비-사후관리에 이르는 비즈니스 프로세스에서의 상호신뢰를 전제로 이뤄진다. 즉, 예나 지금이나 장사는 ‘단골손님(Royalty Customer)’과 ‘돈되는 손님(heavy user)’을 확보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고객만족’과 ‘고객감동’을 가져오는 고객관계관리(CRM)의 기본 원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어쩐지 요즘 벤처업계를 들여다 보노라면 온갖 음모를 자행하고 권력과 결탁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개성 송상(松商)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신문을 연일 장식하는 무슨 게이트며 벤처기업의 추악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코스닥 기업의 작전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비슷한지 ….

고객관계관리(CRM)는 고객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객이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고객을 오래 유지시키고 고객 평생가치를 극대화하여 결과적으로 수익성을 높이는 마케팅 프로세스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e-Business 환경에서 CRM을 성공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웹, 무선인터넷, 전화, 팩스, e-mail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고객과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콜센터와 비즈니스 프로세스 자동화시스템 구축, 그리고 고객의 행동과 수요, 의사결정 등을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마이닝 기술 등이 필수적이다.

기업들이 이같은 CRM 도입을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구사항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제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해야 하며, 가격 경쟁이 아니라 품질 경쟁을, 그리고 마켓쉐어(Market Share)가 아니라 마인드쉐어(Mind Share)의 확충에 마케팅의 무게를 두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 CRM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프로세스가 아니라 솔루션으로 마음의 점유율 보다는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기업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CRM이 마치 기적을 낳는 마케팅기법이거나 컨설팅 회사의 ‘성경책’처럼 인식되고 솔루션 회사들만 배불리는 것으로 오해받고 있는 듯하다. 이는 마치 장사꾼보다는 장사치가, 건달보다는 양아치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과 같다. 오늘 하루 겪었던 몇 가지 사건만 해도 그렇다.


  1. 신문 보지 맙시다.
    아침. 아파트 현관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집어 든다. 이 신문 내가 몇 년 간 봤더라. 한 20년 봤군. 그런데 똑같은 신문을 20년 넘게 봤는데 이 신문사가 나한테 해준게 뭐 있지. 요즘 주유소에선 1년만 기름 넣어도 공구 세트나 상품권 한 두 장 정도는 주던데. 무슨 캐시백인가 하는 카드만 있어도 영화가 절반 값인데. 독자를 봉으로 아나. 이런 신문 70년씩 봤다는 둥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본다는 사람 이해가 안간다. 인터넷 신문도 그래. 사이트 오픈한 이래 회원으로 가입하고 몇 년을 접속해 봐도 그 흔한 마일리지가 쌓이나 내가 좋아하는 박찬호 경기한다고 일정을 메일로 알려주나. 공짜니까 보지 돈 내고 보라면 내 안보고 만다.


  2. 비행기 타지 맙시다.
    서울 출장. 인터넷으로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지난 5년간 벌써 299회 비행기를 탔군. 오늘 비행기를 타면 3백회째. 마일리지 엄청 쌓였네. 공항. 내가 오늘 300회째 탑승이라는 거 아무도 모르나. 축하 메시지라도 탑승권에 찍힐 법한데 아무 말도 없네. 그런데 인터넷으로 비행기표를 미리 하루 전에 구매했는데 왜 이렇게 좌석이 뒷자리야. 오늘 나보다 앞 자리에 앉은 사람들 마일리지 다 조사해서 나보다 낮은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정말 어디 확 고발이라도 해버리고 싶다.


  3. 물건 사지 맙시다.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 주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산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가 고장 났단다. 그래도 잘나가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샀는데 물건 잘 도착했느냐고 메시지는 안와도 고장 났을 때 애프터 서비스 접수는 어디 해야 하는지 알려줘야지. 이건 완전히 물건만 팔면 끝이구만. 차라리 돈 몇 푼 더 주더라도 직접 가서 사고 말지.


고객은 감동받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고객 감동’이나 ‘손님은 왕’이라는 거창한 구호보다는 점심 먹으러 자주 들리는 일식집 주인장처럼 ‘또 오셨군요’ ‘오늘은 횟감이 안 좋으니 도시락을 드시죠‘ 해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밥 값 깎아 달라는 것도 아니다.

CRM의 프로세스처럼 날 좀 알아주고(인식, Identify), 내게 맞는 메뉴를 권하고(선택, Select), 다음에 또 올 수 있는 푸근한 관계를 계속 맺어주면 그만이다(유지, Retain). 그게 그리 어려운가. 정보사회는 정답게(情) 알려주는(報) 사회라는데 정보사회의 장사는 왜 이렇게 무뚝뚝한가.

거창한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이나 Data Mining 솔루션을 도입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것이 물건이건 서비스건 상관없이 고객 중심으로 생각하고 상품판매가 아니라 고객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만이 디지털과 아날로그 경제의 공통된 商道이다. 생각해보라. 인터넷 신문이 뉴스를 독자에게 제공해주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우리 사이트의 독자 수가 몇 백만 명이니 하면서 쪽 수 늘려서 독자의 머릿수를 광고주에게 파는 것이 본업인가. 고객과 관계를 맺으려는 게 목적인가 아니면 고객에게 상업용 메일을 보내려고 데이터를 수집하는 게 목적인가.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보면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만든다는 거야. 너는 아직은 나에게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거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참을성이 있어야 해.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CRM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고객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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