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테메 (epistēmē)

에피스테메 (epistēmē)

0. 요약.
어느 시기에만 특징적으로 존재하는, 바꿔 말하면 어떤 시기를 그 시기로 특징짓는(시대구별의 표준이 되는), 앎(지식)에 대한 (비가시적인) 인식 토대로 작용하는 관계들의 총합. 푸코 본인의 말을 빌자면 "일정한 시기에 있어서 인식론적 형상들, 학문들, 그리고 형식화된 체계들을 낳게 하는 언설적 실천들을 결합하는 관계들의 총체"(지식의 고고학)

위 간략한 에피스테메에 대한 요약을 읽어본 독자들은 대체로 동의하겠지만, 읽어봤자 아리까리한 건 여전한 그런 개념이라고 개인적으론 생각하는 바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과 흔히 비교되기도 하는데(이광래의 '미셸 푸코'에서는 이에 대해 꽤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 에피스테메는 쿤의 '패러다임'과는 구별되는 푸코만의 고유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함축해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은 "역사적인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인, 선험적인 개념)"이라는 말인데, 역시나 즉각적으로 대부분의 독자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하는데, 이 역시도 아리까리하기는 마찬가지다(덧. 저련의 댓글 논평 참조)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특히 서설에서 '언술' '담론'에 대한 서술들은 이 '에피스테메'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실천적인 예시'로 적당한 시사점을 주지 않나 싶은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인다. 특히 "언설적 규칙성들의 수준에서 학문들을 분석하고자 할 때 제반 학문들 사이에서 일정한 시대 동안 발견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미셸 푸코)라는 지적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이며,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 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자 "동업조합적 제도"라고 말하는 것과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의미론적인 울림을 준다.

아래에서 인용한 문장들은 이 '에피스테메'를 이해하는데 아주 조금은 도움을 주는 미셸 푸코에 대한 평론서에서 옮겨온 것이다(물론 저작권 문제되면, 아무래도 비평을 위한 인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적으니, 바로 삭제할 예정이시다...;;; 이런 책 별로 살 것 같기도 않은데, 이렇게나마 노출도를 높여주는 차원에서 넉넉한 해당 출판사와 저자의 이해가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이런 글이 있는지 저자나 출판사가 발견할지도 의문이기는 하지만... )


1. 푸코와는 별 상관없는 에피스테메

에피스테메 [(그리스 어)epistēmē]
[명사]<철학>
1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이르는 말.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실천적 목적에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원리 및 원인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이르는 말.

에피스테메
과학적 지식, 직업적 ·전문적 지식, 지식 일반을 가리키는 말.

철학용어로서는 실천적 지식(프로네시스)과 상대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지식, 또는 감성에 바탕을 둔 억견(臆見:독사)과 상대되는 참의 지식을 말한다.독사와 에피스테메의 구별은 이미 파트메니데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구별한 것은 플라톤이다. 그는 에피스테메와 에이도스를 밀접하게 관련시키면서 독사와 아이스데타(감성적으로 파악된 것)에 대립시킴으로써 참된 지식의 위상(位相)을 인식론적 ·존재론적으로 규명하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능력을 말한다.

2. 김현의 푸코 연구서인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설명하는 에피스테메
3) [말과 사물](1966)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그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것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것은 어떤 시기에 인간에 대한 온갖 종류의 앎의 밑바닥에 있는 심적 하부구조이며, 역사적인 아 프리오리를 구성하는 개념 장치이다.

푸코가 과학사나 일반 사상사와 혼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에피스테메의 역사는 에피세테메에 의해 구분되는 역사권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을 강조한다. 안정되고 항구적인 대상에 대한, 더 충실한 해석이나 더 현실주의적인 이해의 방향으로 가는 지식 체계를 그 책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그 책은 오히려 네 개의 에피스테메(민노씨 주: 르네상스 1500~1660 - 고전주의 1660~18000 - 근대 1800~1950 - 1950년대 이후) 사이에 존재하는 수수께끼 같은 불연속을 분석한다. 그 에피스테메는 17세기 중엽까지 지배한 전-고전적 에피스테메, 180세기말까지 그 뒤를 이은 고전주의적, 현대적(민노씨 주 : 이광래는 "근대"로 번역하는 걸, 김현은 "현대"로 번역한다. 둘은 같은 표현이다), 그리고 끝으로 1950년경 이후에야 형성된 동시대적 에피스테메이다. [말과 사물]에서는, 첫번째 에피스테메와 마지막 에피스테메는 개괄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고전주의적, 현대적 시기의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의 계기를 묘사하고, 인과적으로 그것들을 설명하지 않는 것이 푸코가 노리는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드러내놓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데, 고의적으로 에피스테메 변화의 원인이라는 문제를 피해한 것이다. (Merquior, Foucault ou le nihilisme de la chair. P.U.F. p42.)

푸코가 고의적으로 에피스테메 변화의 이유 규명이라는 문제를 피해간 것은 그가 개념사를 중요시하는 바슐라르, 카바이예스, 캉기예의 현대과학사학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스승이었던 캉기옘은 40, 50년대의 프랑스 인식론을 지배한 바슐라르의 제자이며 후계자이다. 그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그의 인식론의 중요한 분석 도구로 이용했으며, 그것은 불연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많은 프랑스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바슐라르와 매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알튀세르까지 그 개념을 이용하여, 마르크스의 존재 변화를 설명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이론의 밑바닥에는, 과학적 인식과 일반적(상투적) 인식 사이에는 단절이 있으며(그 단절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이 인식론적 방해물들이다), 과학적 인식의 획득은 지식의 축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발견에 의거한 단절에 의해 얻어진다는 생각이 숨어 있으며, 그 생각의 더 밑바닥에는 인간의 사유는 오류에 의거해 있으며, 인간은 계속적인 교정에 의해 그 유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는 오류의 이름이 숨어 있다. 오류는 그러므로 악덕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 자체이다. 오류에 대한 위협적 언사는 오류의 교정이라는 치료술적 언사로 뒤바뀌고, 단절은 당연한 인식론의 한 범주가 된다. 푸코는 그 바슐라르의 학파에 속해 있다. 그의 단절은 그러므로 역사 이해의 결여가 아니라, 그의 이론적 성찰의 당연한 결과다. 역사를 계속적인 교정의 연속으로 본다면, 역사의 인과론적 설명은 그 의미를 거의 잃게 된다. 아무런 내적 논리 없이, 마치 산소가 갑작스럽게 발견되어 연소라는 현상이 설명되듯, 에피스테메들이 계기적으로 나타난다면, 인과 관계보다 현상의 의미가 더 중요시될 것이 틀림없다.

푸코를 뒤따라가자면, 전-고전적 에피스테메는 유사성과 조응의 에피스테메다. 그런데 갑자기 17세기에 유사성과 조응의 에피스테메가 붕괴하고 재현의 에피스테메가 나타난다. 그것은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의 넋이며,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말까지를 지배한다. 19세기부터,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는 조종을 울리고, 역사가 전명에 나서게 된다. 질서의 역사로의 변화이다. 사물들은 도표에서 해방되어, 그 내석 공간을 드러낸다. 내적 공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현대적 에피스테메의 범주는 인간학적이다. 그것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성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 시칠리아의 암소, 김현문학 전집10, 문학과 지성, 1992. pp.181~182.

3. 이광래의 [미셸 푸코]에서 설명하는 '에피스테메' (이하 괄호의 숫자는 해당 책의 페이지수를 표시)
그는 역사의 연속성과 전체성이라는 도그마를 거부하면서 사상사의 리듬을 부여하는 본질적인 단절과 변화에 대해 역설한다. 즉, 지(知)의 질서에 있어 인간의 지각이나 관행을 일변시키는 불연속성을 명백히 드러내려 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어떤 사대의 앎을 구성하는 요소는 데카르트와 칸트, 또는 헤겔과 같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 이름을 숨김으로써 이들의 이름과는 무관하게 생산되는 일련의 언설에 있다. 헤겔에서 있어 사상사는 인간의 의식적인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며, 이러한 논리는 일원론이라는 철학적 진리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 사상사는 의식의 어떤 일반적인 모델로도 환원될 수 없다. 사실상 모든 시대의 언설, 즉 앎의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말해지는 것'의 총체를 생산한다. 이에 따라 그가 계획한 역사연구도 어떤 시대의 episteme를 구성하는 언설의 총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에피스테메는 그 이전의 사상가들을 논하지 않으며 하나의 에피스테메 내에 있는 사상가들은 그 이전의 에피스테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다.(79)


...[계보학]이라는 용어로 푸코가 자신의 평생 동안의 연구방법을 조명한 경우를 살펴보자. 푸코는 1983년 미국의 버클리대학에서 레비노우, 드레이퍼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계보학에는 세 가지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자신을 지식의 주체로 구성하는 진리에 관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이다.
둘째,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체로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권력분야에 관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이다.
세재, 우리가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윤리에 관한 역사적 존재론이다.
이와 같이 계보학에는 세 개의 축이 있을 수 있다. 이들 세 개의 축은 [광기의 역사]에서는 다소 뒤섞여 있었지만, 모두가 각각 등장한 바 있다. 진리의 축은 [임상의학의 탄생]과 [말과 사물]에서 연구되었고, 권력의 축은 [감시와 처벌]에서, 윤리의 축은 [성의 역사]에서 연구되었다. (Paul Raninow, The Foucault Reader, Penguin, 1984, pp.351~352).
이상에서 보듯 푸코의 사상적 파노라마는 굳이 '계보학'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더라도 초기에는 의심할 바 없이 푸코 나름대로 정의한 에피스테메와 연관된 언술형성으로서의 앎에 대한 분석이었다. (84)


...... 푸코에게는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사유방식의 경계가 무엇인가? 우리의 현대 서구인들은 어떻게 현상을 질서지우는가?
푸코의 인간과학의 고고학은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역사적인 전망 속에 제기된 하나의 대답을 제공하려는 시도다. 푸코는 이 책(말과 사물)의 머리말에서 "모든 문화에 있어서 질서정연한 규약이라 불리우는 것의 사용과 질서 자체에 대한 반성 사이에는 질서와 그것의 존재양태에 대한 순수한 경험이 놓여 있다. 이 연구는 그 경험을 분석하려는 시도이다"(푸코, '말과 사물'(1966), 이광래역, p.13. 민음사, 1987)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말과 사물]의 주제는 경험에다 질서를 부과하는 근본적인 문화적 규약들(codes)이다. 즉 그것은 "어떤 질서의 공간 내에서 지식이 구성되었으며, 어떤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선험적 관념)에 근거하여, 그리고 어떤 실증성의 영역 내에서 관념이 출현했고, 학문이 구성되었으며, 경험이 철학 내에서 반성되었고, 합리성이 형성되었고, 그리고 얼마 후에 해체되고 소멸해 버렸는가에 대한 탐구이다."(푸코, '말과 사물'(1966), 이광래역, pp.19~20. 민음사, 1987) 따라서 푸코는 이처럼 "사유의 어떤 형식을 필요케 하는 그런 것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해 '고고학'이라는 상표를 골라냈다. 고고학은 필연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이고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사유형식들-푸코는 이것을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을 다룬다.
그에 의하면 에피스테메는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선험적 관념)'다. 그것을 일군의 다양한 언설을 지탱하는 감춰진 질서이다. 그것은 앎 바로 밑에 누워 있는 조직이며 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의 피안에 있고, 어떤 시대 또는 어떤 영역에 있어서도 학문에 무의식적인 골조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일정한 시대에 우리 인식의 지평과 문화적 구조를 가능케 하는 하부구조를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 그것은 지식의 공간에 배치된 경험의 근본적인 존재양식, 역사적 과정에 내재해 있는 구조의 필연적 체계, 혹은 일정한 시대의 특징적인 지식과 눈에 드러나는 역사의 줄거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의 총체다. 그에 의하면,
에피스테메는 일정한 시기에 있어서 인식론적 형상들, 학문들, 그리고 형식화된 체계들을 낳게 하는 언설적 실천들을 결합하는 관계들의 총체이다. .... 에피스테메는 매우 다양한 학문 영역들을 넘나들면서 하나의 주체나 정신 또는 어떤 시대의 지배적인 통일성을 나타내는 인식의 한 형태나 합리성의 한 유형이 아니다. 그것은 언설적 규칙성들의 수준에서 학문들을 분석하고자 할 때 제반 학문들 사이에서 일정한 시대 동안 발견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다.(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갈리마르, 1969, p.250)
이처럼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일정한 시대 동안의 언설=실천을 결합하는 관계들의 총체(서구 사상에 있어 여러 시대들을 특징지우는 관념적인 층)로 파악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란 곧 고고학적 모델을 발견해내는 일이었다. 때문에 푸코는 [말과 사물]의 영어판 서문에서 이른바 사상적 고고학을 가리켜 "무형식의 지식체계에 대한 역사"라고 표현한 바 있다. (144~146).

- 이광래, '미셸푸코', 민음사, 1989.


* 재밌는 관련글
블로거 선민이 쓴 '표절발견'이란 글에 따르면, 위 이광래의 글은 김현의 위 인용에도 등장하는 브라질 학자라는 메르키오르(Merquior. 위 김현이 인용한 그 책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메르키오르가 쓴 푸코에 관한 연구서)를 표절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물론 진실이야 난 모르겠다. 이광래의 [미셸 푸코]는 대단히 망라적으로 미셸 푸코의 철학적 연대기를 기술하고 있기를 하지만, 위 선민이 지적하는 것처럼 종종 어색하기 짝이 없는 번역투, 망라적인  '짜깁기' (인용)의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김현의 책은 반면 너무 단편적으로 분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적어도 김현의 '호흡' 안에서 푸코가 다뤄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광래의 글의 호흡과 구별된다. 물론 김현도 인정하는 것처럼 이광래의 '푸코 관련 서지'는 거의 모든 관련 서적들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청나게 꼼꼼한 서지인데, 솔직히 저 많은 글들 가운데 얼마나 읽었을까... 싶은 유치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려니와, 저 많은 책들을 참조하면서 저자 스스로의 관점이 상당부분 지워진 것은 아닐까 싶은 의구심도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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