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신경질 2. : 리카르도님의 댓글을 추론함

비판과 신경질 2. : 리카르도님의 댓글을 추론함

음.. 맥루헌의 미디어의 이해를 제대로 안읽으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롭고 오래되었고의 구분을 떠나, “메체 자체가 곧 메세지” 가 맞습니다.

좀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단지 오래된 기술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한 집단과 충돌한다는건, 정말 초보적인 이해에 불과 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맥루헌은 미디어의 “내용”이 아닌 속성을 기반으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진행했습니다.
그 속성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그 누구도 정의 내릴순 없구요.
즉, 올드미디어의 세력이, 뉴미디어의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는것이죠.
예를 든다면, 위에서 말한 예의 바로 아래에 나와있는, IBM이 되겠죠.
비록 타인의 주장을 인용하신 글이긴 하나, 책을 직접 읽으면 너무나도 뻔한것 인데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내용 하나 없는걸 보니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에 남긴 리카르도님의 댓글

위 리카르도님의 논평을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이하 '대상글')라는 글과 관계 속에서 해석해보죠.
물론 저는 이 직전 글에서 이 논평은 무슨 해석이 불가능한 수준의 추상적 언급이라고 말했습니다만, 굳이 해석해보자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추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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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맥루헌의 미디어의 이해를 제대로 안읽으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롭고 오래되었고의 구분을 떠나, “메체 자체가 곧 메세지” 가 맞습니다. (리카르도)

"미디어는 메시지다."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의 제1부 첫째장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그 장의 제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직접 읽어보지 않은 분들도 익히 들어보고, 또 종종 사용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카르도님께서 강조하시는 관점은 이 문구의 해석, 특히 맥루한이 강조했던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맥루한을 읽어봤든, 읽어보지 않았든, 그 책에 관한 이차 평론, 논문(에세이)를 읽어본 분들, 하다못해 맥루한의 위 명제에 대한 저널리즘 비평을 접한 분들 조차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단순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의미가 다소 맥루한의 취지와는 달리 오용되고 있다고 리카르도님은 불만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가령 제 글인 '조선일보 기고자들'에서는 위 맥루한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저는 이렇게 쓰고 있죠.

미디어는 메시지다. (마샬 맥루한)
미디어는, 그 자체로 메시지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기고하는지가 당신이 향하는 지향을 말해줍니다.
(물론 맥루한의 취지가 이런 것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그리고 이런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당파를 강조하기 위해, 위 예에서처럼 조선일보를 비판하기 위해 쓰이는 용례의 폐해가 없지 않다고 여겨, 참고글로 '대상글'을 덧.으로 본문에 보충했습니다. (그 오래된 조선일보 관련글에 리카르도님의 댓글이 있었고, 그래서 첫 댓글에 대해선 인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후에 다시 댓글이 있었는 줄은 '독자'라는 임시필명께서 이 글 직전에 쓴 글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야 알았습니다.)

덧. 위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해석에 대해선 다음 글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고 했을 때, 그 메시지라는 것은 새로운 매체가 열어놓은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토록 자주 인용되는 맥루한의 그 유명한 선언은 정확히는 “미디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the medium is socially the message)”라는 것이 ‘미디어 이해하기’의 비평판을 편집한 테렌스 고든의 해석이다.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

아마도 리카르도님께서 이해하시는 바, 맥루한의 관점은 '미디어 그 자체의 속성', 즉 인간이라는 감각기관의 총체적인 확장으로서의 미디어가 갖는 속성에 주목했는데, 왜 정치적인 메시지의 당파적인 차원에서 맥루한을 인용하는가? 나는 그것이 불만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에 대한 일반적인 오용이라고 인정한다고 칩시다(이하 '오용'). (물론 여기에 대해서 달리 판단할 여지는 매우 크지만요)

그렇다면 리카르도님께서 강조한 미디어의 속성이란 무엇인지 추론해보죠.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확장'입니다. 리카르도님께서 강조하는 관점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쉽게 설명될 수 있겠죠.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고, 전화기는 입과 귀의 확장입니다.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고, 마이크는 입의 확장이라고요. 이렇게 인간의 신체기관은 새로운 도구들의 발명으로 인해 끊임없이 확장합니다.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그 모든 것들은 바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리카르도님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인식의 깊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널리 알려진 '상식'에 가까운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제가 리카르도님의 논평에 대한 재해석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힌 이유는 리카르도님이 논평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글인 '대상글'은 이런 인식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즉, 대상글은 리카르도님께서 염두에 두고 있다고 저는 추론하고 있는 그런 '단편적인 문제'가 아닌, 혹은  맥루한이 비판받는 '쿨미디어/핫미디어'에 대한 아리까리한 구별 표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이것을 매개하는 수단이자, 그 자체로 인간의 확장으로서의 미디어가 어떻게 '사회적인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 그리고 맥루한(혹은 맥루한 연구자인 어떤 학자)은 이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즉, 리카르도님의  거시적 의도를 추정해보면, 일반적인 '오용'에 대해 불만을 갖고 계셨다면, 그 의미를 포괄해서 좀더 포괄적인 의미의 지평을 마련하고 있는 대상글을 옹호해야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미디어의 속성'이라는 단편적이며, 교조적인 언어에 집착해서 대상글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혹은 오독하고 있다고 저는 판단했던 것입니다.

'대상글'는 두 가지를 주로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오용'(혹은 과도하게 확장적으로, 수단으로 비유)되는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해석 용례에 대해 좀더 맥루한의 취지에 가깝게 그 의미를 한정하면서, 동시에 '고든의 해석을 토대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즉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가 갖는 의미가 어떤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지를, 왜 "미디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라고 해석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글입니다.

이에 대해 리카르도님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ㄱ. ㄴ. ㄷ. 의 구별은 제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ㄱ. 아시다시피 맥루헌은 미디어의 “내용”이 아닌 속성을 기반으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진행했습니다.
ㄴ. 그 속성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그 누구도 정의 내릴순 없구요.
ㄷ. 즉, 올드미디어의 세력이, 뉴미디어의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는것이죠. 예를 든다면, 위에서 말한 예의 바로 아래에 나와있는, IBM이 되겠죠.
ㄱ. 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ㄴ. 이 부분은 왜 뜬금없이 나왔는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아마도 '대상글'에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 기존 매체는 늘 새로운 매체에 대해 불평하고 견제하고 심지어 폄하했다."라는 문장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미디어의 속성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단정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한 정의에 가까운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미디어 연구자들, 미디어 학자들이겠죠. 리카르도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정의"가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1) 그저 '단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면 대단히 무의미한 언어이고(따라서 비평언어로는 가치가 없고), (2) 이 '정의'를 '해석'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미디어의 "속성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리카르도) 해석하는 것이 존재이유인 '미디어 학자'들의 존재가치를 아예 폐기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반응은 ㄷ.과 이어지는데요.
ㄷ. "올드미디어의 세력이 뉴미디어의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라고 리카르도님께선 말씀하시는데, 제가 거듭해서 '대상글'을 꼼꼼히 읽어주십사 부탁드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지적은 대상글을 최소한으로 정독했다면 있을 수 없는 '반론'이기 때문입니다. 때론에 이것은 반론이 아닙니다. 대상글 초반부는 이 기존 세력이 새로운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를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미국 3대 공중파 네트워크 방송(NBC, CBS, ABC) 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발명인 전기와 전신을 이뤄낸 세 개 회사의 이름이 나온다. 토마스 에디슨의 GE, 웨스팅하우스 전기, 그리고 AT & T 이다. GE는 현재도 NBC를 소유하고 있고, 웨스팅하우스 전기는 CBS로 이름을 바꿨다. NBC에서 분리되어 나온 ABC는 월트 디즈니사에 의해 인수되었지만, 최근에는 애플 컴퓨터의 스티브 잡스가 최대 주주로 등극하게 된다. 전기와 전등, 통신,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발명했던 회사들이 텔레비전 방송 네트워크라는 가장 진화된 올드 미디어 매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

리카르도님의 대상글에 대한 논평(이라고 굳이 쥐어 짜낼 수 있는 부분)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다시 훈계에 돌입합니다.
"비록 타인의 주장을 인용하신 글이긴 하나, 책을 직접 읽으면 너무나도 뻔한것 인데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내용 하나 없는걸 보니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리카르도)

이런 댓글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저로선 오히려 독자와 동료블로거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감정적으로 리카르도님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판단하신다면 그 판단을 존중합니다. 다만, 리카르도님은 정말 맥루한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상적인 수준으로 알고 있' 한 줌의 지식을 근거로, 즉 자신이 이해한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해석를 근거로 좀더 깊이있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글을 일방적으로 훈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글 제목으로 표현했듯이 '오만방자'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서울비님께서는 저에게 침착을 당부합니다만(물론 그 마음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글을 쓴 분을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한다고 밝힌 부분에 대해서 불만이 계신 것 같은데요(특히 김기자님). 제가 (어떤 의미에서든) 매우 좋아하는 어떤 블로거 A가 있다고 치죠. 그리고 그가 쓴 글 a가 있다고 칩시다. 그 a를 B라는 블로거가 매우 설득력있게 비판한다면, 저는 그 B가 a라는 글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B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B의 비판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높게 평가했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그동안 해왔던 블로깅을 최소한으로 지켜봐주신 분이라면, 이러한 제 블로깅의 원칙과 방법론을 최소한으로 인정하시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B라는 블로거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a라는 글에 대해 훈계를 늘어놓는다면, 당연히 짜증나고, 불쾌하며, 어처구니가 없어질 겁니다. 더욱이 그 B가 그래도 저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던 블로거라면 더더욱 B를 위해서라도 B의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비님께서는 댓글을 통해 "논쟁에서 글쓴이의 '태도'를 공격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언급하셨던 기억"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논쟁의 본령에서 벗어나 반론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태도를 물고 늘어지는 행태에 대해선 물론 그 방법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그와 유사한 언급을 했을 수는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줄곧 그 비판의 '태도' 역시도 비판행위의 '일부'라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저는 그 태도야말로 비판행위의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라고 강조해왔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진중권의 방식에 대해 때때로 매우 비판적인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비평의 몸, 비평의 마음)

즉, 제가 진중권의 진영에 속하면 진중권이 '우리의 적을 씹는' 그 공격적인 언어들은 저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줄겁니다. 하지만 어떤 이슈에 대해 진중권과 반대 진영에 선다고 치죠, 그럼 그 진중권의 조롱과 경멸의 외투를 입은 언어들은 저에게 큰 모멸감과 모욕감을 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비판행위는 좀더 커다란 조화의 이상 아래서, 서로의 '우열'이 아닌, '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것, 그래서 좀더 큰 조화의 방법론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이해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비판행위 그 자체에 내재된 '내용으로서의 방법론(논리, 근거, 철학, 지식의 양)'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것만을 '쿨'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죠. 다만 일상적인 토론과 대화의 방식으로 실천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그 '비판의 태도' 역시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비판과 태도는 서로 따로따로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비판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어떤 무례한 행위에 대해선 그저 그 무례한 행위를 비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 관련
비판과 신경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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