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와 노무현 : 다시 노무현으로, 그리고 노무현을 넘어서

아파트와 노무현 : 다시 노무현으로, 그리고 노무현을 넘어서

행인, 모순의 시대 (2009.6.23)에 대한 단상.

1. "이명박 죽일놈이라는 생각이 이제 보편성을 띨 정도로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프리미엄이 어떻게 변동하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 (...)"

이 지적이야말로 현 대한민국의 사회정치경제적 제문제의 근본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파트 프리미엄에 집착하는 욕망, 소박해서 더 처절하게 뼈속까지 들러붙은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이 세속적 욕망은 어떤 정치적인 쇼크, 어떤 사회적인 계몽으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경쟁적이고, 폐쇄적인 욕망들을 사회적인 상상력, 정치적인 상상력이 만개한 공동체적 소망과 최소한으로 '경쟁'시키거나, 혹은 양자를 '(상생적) 긴장'관계에 위치시키지 못한다면  현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암흑'과 '모순'의 시대는 계속되겠지요.

다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이란 무엇인지, 그 실천이 과연 현 시스템에서 가능하기는 할지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파트가 대한민국 신민들의 경제적인 욕구를 상징한다면, 교육은 그런 경제적인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표피적 합법의 기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저명한 서구의 사상가를 굳이 빌려오지 않아도, 교육과 경제라는 양대 시스템은 좀더 정교하게 21세기적 자본주의 신분 질서를 공고히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모순이 문화의 힘, 지식의 힘, 교양의 힘으로 전부 타기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모순적인 암흑의 구조를 거듭 거듭 고민하고, 또 이야기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무슨 권위적이고, 계몽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우리에게 스스로 부여하는 암흑의 구조에 한 부품처럼 소모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고, 또 대화하는 일상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일상적인 대화의 방식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무는 "소통하는 진보"의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을 고민하고, 확장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저처럼 따분한(ㅡ.ㅡ;;; ) 방식으로 글을 쓰는 블로거가 이런 이야기를 거듭 거듭 강조한다는 것도 좀 모순적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라는 인식을 좀더 널리 퍼뜨리고, 또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그렇게 대화하는 방식 자체가 '문화의 한 형태'로, '일상적인 대화'로서, 그 자체로 삶의 소박한 유희의 한 형태로 이 사회에 자리할 수 있을 때야 말로 이 모순을 깨뜨릴 수 있는 토양을 비로소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2.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이 구호는 아직도 비통한 마음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감성적 접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그 구호는 또다시 이명박이라는 물건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노정 (...)

더불어 지적해주신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의 위험성에 대해선 저 역시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 구호는 그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함께' 박해하고, 박해받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순교자로서의 중층적인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 구호의 위험에 대해 지적하기 보다는, 아직은 그 구호가 갖는 정치적인 함의와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좀더 효과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즉,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가 감성적이고, 순진한 접근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감성적인 접근이 갖는 잠재적인 에너지들, 그 안에 내포된 의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와서, "노무현을 넘어서"라는  구호로 발전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 다른 이명박"을 예비하는 것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지금 고민하기 보다는, 현재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비상식'과 '반민주주의'의 가장 탁월한 항체로서, 그 상징으로서 좀더 드높게 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상징)는 크게 두 가지 가치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언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가 상식의 회복이라면, 그것의 좀더 구체적인 표현형태인, 절대주의적 국가권력을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다른 하나겠지요. 폭압적인 국가권력이 다시는 국민들을 옥죄어선 안된다는 기본적인 공화국의 정신, 국민주권이 그 최소한의 존엄성을 담보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질서의 회복을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는 우리에게 '죽지 않는 상징'으로 거듭 되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가치가 현재의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너무도 극심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다시 극복함으로써 노무현을 넘어서는 순간이 올 때까지, 노무현이라는 상징의 가치는 지워져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본문 내 링크
노무현, 우리의 가장 위대했던 상징이 쓰러지다.
노무현을 못박다 : 상징으로서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유행어

조아신, <소통하는 진보 - 미디어,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새드개그맨, 김작가의 이메일


* 발아점 / 대상글
행인, 모순의 시대 (2009.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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