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까말은 살어있다 : 엔디의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를 읽고

솔까말은 살어있다 : 엔디의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를 읽고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
http://endy.pe.kr/221

아거의 짧은 소개처럼 엔디의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이하 '빨간 사과')는 '강추'가 아깝지 않은 탁월한 '문화비평'이다. 이 글은 엔디의 '빨간 사과'에 대한 짧은 독후감이다. 무한도전만 독후감식 감상문 쓰란 법있나, 이런 탁월한 글이야 말로 거듭 읽히고 칭송받고, 반박되어야 마땅하다. 대화라는 화로 속에서 '불타 오르길' 바라는 엔디의 바람처럼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글에서 글로 타올라야 마땅하다. 이 짧은 글이 작은 불쏘시개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물론 그것 역시 너무 큰 바람이겠지만...

'빨간 사과'는 완벽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그 구성이 너무 미끈하게 잘 빠져서, 주제가 대단히 무겁고, 또 도덕적인 완고함, 복고적 색채마저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세련된 뮤직 비디오 한편을 보는 것 같은 심미적 시각감마저 전해준다.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라는 제목은 글의 주제, 스토리와 완벽하게 부합해서 글을 읽고 난 뒤에도 강한 여운을 남긴다.

텍스트에 드러난 엔디의 취지를 그대로 쫓자면 이 글은 정말 빈 틈을 발견하기 어려운, 찬사만을 받아야 마땅한 글이지만, 굳이 관점을 비틀어 해석하면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의문이라고 표현했지만, 솔까말, 딴죽에 가까운 것이리라.

1. 너무 아름다운 결론.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 등장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빨간 사과'의 결어에 등장한다. 그 결론은 너무 소박하고, 또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어떤 현실적인 에너지도 발견하기 어려운 결론이다. 그건 좀 거칠게 표현하면, 도덕적 보수주의의 결론이다. 인간의 마음, 소년의 마음,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 그 결론은 '빨간 사과'의 자신만만하고, 도전적인 서두와 비교하면 너무 수동적이고, 또 비전 없는 결론이다. 이 점은 대단히 아쉽다.

2. 솔까말과 살'어'있다의 사회학.
'빨간 사과' 속의 문맥에서 '솔까말'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해석되는지는 직접 한번 읽어보시라. 다만 '빨간 사과'에서는 솔까말이라는 사회적 기호의 한 쪽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건 글의 전체 문맥을 지탱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가능성을 버린 것 같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편향이다.

솔까말, 그 말은 일종의 도구적인 기능성의 차원에서 그 말의 화자에 따라 억압과 야만의 언어로도, 또 그 야만과 억압을 폭로하는 해방의 언어로도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당대 대한민국 사회의 야수성을 강화시키고, 기존 사회의 관성적 막장이즘을 강화하는 기호로 사용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말이 갖는 이중적 함의의 다른 부분, 우리 안의 야수성, 야만성을 다시 해체시키고, 또 까발기는 언어로서 그 말이 사용될 수 있도록 꼬셔내는 일, 그 일이야 말로 엔디 같은 젊고 탁월한 글쟁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솔까말, 솔까말은 억압과 해방, 복종과 거부 모두의 영역에서 가능성을 갖는 언어다. 언젠가 이윤택(혹은 김광림)은 이런 재밌는 조어를 만들어 연극 제목으로 삼은 일이 있다. 죽었다와 살았다를 합성해서, '홍동지는 살어있다.'라고 말이다. '솔까말'은 살'어'있는 말이다. 그걸 살'아'있게 하는 건 살어있는, 하지만 살아있어야 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 초강추
빨간 사과의 진실과 구라 (엔디)
http://endy.pe.kr/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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