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엔도와 거짓을 숨기기 위한 진실

비판에 대한 피로감, 좀더 정확히는 거기에 남긴 나솔의 댓글(들)에서 이어지는 글.


1. 이누엔도 (Innuendo)

속임, 기만이라는 주제는 매혹적인 주제다. 그건 말과 글이 존재하는 한, 그 말과 글을 통해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러니 아마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주제이기도 하다.

이누엔도(Innuendo) 1. (@gatorlog) http://bit.ly/d2WofU 
발화자의 부정적 편견을 우회적으로 은연중 독자/청자에게 내면화시키는 지적(수사적) 조작.
"선장은 오늘 하루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이누엔도(Innuendo) 2. (@gatorlog) http://bit.ly/cR19Wv
1. "의미의 단언적 전달을 제한하는 척하면서 애초 의도한 의미를 그대로 전달"
2. "사람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직접적인 공격만큼 효과가 있다"

암시적인 의식조작? 우회적인 의식조작? 적당한 우리말 표현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각설하고, 아거의 우려처럼 이누엔도는 여러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ㄱ. 우선 수용자(독자/청자)를 피동화된 선동과 조작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ㄴ. 발화자가 의도한 편견을 확대하기 위한 기만적인 언술장치이며, ㄷ. 주로 인신공격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누엔도는 투명한 언어가 아니라, 구정물의 언어다. 이누엔도가 판치는 세계는 점점 더 탁해질 수 밖에 없다.


2. 거짓을 숨기기 위한 진실
이누엔도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황지우의 오래된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기억의 변주가 있었을 수 있으나, 대충 기억하기엔 이런 문장이다. "범죄자는 거짓을 숨기기 위해 진실을 말한다. 그 때의 진실이 중요하다." 일견 진실이 갖는 상대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이 문장은 이중적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 거짓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이 첫번째다. 동시에 그렇게 거짓을 위해 동원되고, 수단화된 진실을 그렇다면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다. 거짓을 위해 동원된 진실을 그저 폐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진실을 그 거짓을 깨뜨리기 위한 도구로 다시 재도구화할 것인가? 도구화된 진실은 어디까지가 수단이고, 또 어디까지가 목적인가? 그 양자는 어떻게 구별가능한가?

nassol  2010/02/03 16:33

저도 소망이 감지되는 비판이 좋아요. 물론 비판이 신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비판할 점이 있다면, 소망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꼬집으려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통쾌하기도 하고 그리고 충격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망이 감지되지 않으면 무력감이 느껴져요. 비판하는 것 만으로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소망이 없는 비판은 존재 이유가 없는 듯 하고요. 바라는 상태가 없는데 무슨 괴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소망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으면, 마치 비판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 사람 조차도 소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력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비판하는 능력도 안 뛰어난 저는 더욱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요. 비판하는 분이,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세요, 행동으로 보여주세요'라고 독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소망을 보여주지 않을 때 독자가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서 인지하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이누엔도가 기만과 조작을 위한 권력적 언술의 기술적인 방법론을 이야기한다면, '거짓을 숨기기 위한 진실'의 문제는 권력적 언술의 자기 해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만을 위해 종사하는 진실은 어떻게 스스로의 회로 속에 들어가 그 진실로 위장된 기만의 성채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정교한 회로를 해체시킬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여기에 쉬운 길, 쉬운 답은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소망을 대화를 서로에게 투사해볼 뿐이다. 이것은 진실과 기만의 게임이면서, 또 자기를 던져야 하는 게임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게임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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